‘과거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자 한다.’라는 랑케의 말만큼 역사 이론서에 많이 인용되는 구절도 드물다. 랑케는 박식한 문헌학자이자 역사가였을 뿐 아니라, 젊은 학자들을 국가 문서 보관소로 보내어 역사 연구에 어떤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배우도록 이끈 혁신적인 스승이었다. 그는 면밀한 대조와 분석 같은 고전적 문헌학의 방식을 활용하여 사료(史料)의 신뢰성을 꼼꼼히 검토했다. 이처럼 수준 높은 비판적 기준을 적용한 사료의 활용은 역사가의 작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사실의 확정에 있어서 객관성을 보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랑케는 역사가가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 ‘자아 소거’를 통해 객관적인 과거 사실이 저절로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방법론적 기여로 인해 랑케는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연구의 선구자로 칭송을 받아 왔다.
하지만 사료 비판의 엄정성이라는 원칙과 관행이 랑케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말부터 독일에서는 괴팅겐 학파를 중심으로 문헌학 및 언어학적 방법을 동원한 사료 검증이라는 전통이 성숙되고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때 이미 문헌 비판의 전통이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따라서 랑케에게 주어지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명성은 흔히 알려진 대로 사료 비판의 엄정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독일의 사상가 훔볼트의 교육적 이상에 따라 발족된 베를린 대학에 그가 역사학과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점, ‘세미나’라는 엄격한 학문적 수련을 통해 수많은 전문가를 양성함으로써 역사학의 영속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점 등이 더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그와 그의 제자들이 확립한 방법론적 학문 관행이 프랑스와 미국 등 서구 사회는 물론,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학 수립 시기에 결정적인 모델로 작동하였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그런데 동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랑케 사학을 받아들인 방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랑케 사학에서 사료의 실증이 요체라고 이해한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랑케 사학을 가리켜 과학적 역사학과 동의어로 쓰이는 ‘실증 사학’이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증’이란 말이 자료의 엄정한 검증을 의미한다면, ‘실증 사학’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도 없고 오해만 야기할 뿐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사료의 실증은 랑케 사학만의 요체가 아니며 모든 역사학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실증 사학의 개념이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개념으로 혼동되어 쓰이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랑케 사학의 철학적, 세계관적 특성을 간과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실증주의 사학은 근본적으로 법칙 정립적인 과학을 추구하므로, 실증주의 사학에서는 검증된 사료 하나하나가 결국은 과학 법칙을 세우기 위한 자료가 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랑케의 관점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역사의 모든 순간은 신과 직결되어 있다.’라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랑케는 어떤 역사 사건들이 자료로 검증되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역사의 발전 방향을 귀납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실증주의적 사례라고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랑케 사학, 그리고 랑케의 뒤를 이은 역사주의적 역사학의 인식론은 역사 서술이 자연 과학과 달리 개별적 사건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중시하는 개체 기술적 학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또 랑케가 생각했던 역사가란 경험적 귀납 논리로 객관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가 아니라 모든 존재에서 무한한 그 무엇을 인식하는 사람이자, 철학자를 대신하여 인간 세계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지식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있는 사실 그대로’ 기술하라는 랑케의 원칙은 역사적 사건의 개별성을 전제하고, 그에 따른 묘사 자체가 역사 서술의 궁극적 목적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랑케의 전제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동아시아 역사학계가 랑케 사학을 두고 실증 사학이라 일컬은 것은 온당치 못하다. 또 실증주의 사학이라고까지 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과학적 역사학의 대명사라고 부른 것도 타당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랑케 사학을 들여오던 당시 동아시아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적 오류였다. 랑케 사학의 본질을 개념적, 언어적으로 혼동한 학계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역사적 과제에 몰입하여 자의적으로 그의 역사학을 수용했던 것이다. 특히 랑케 사학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수용했던 일본에서는 사료 비판과 엄정한 객관성이라는 외피만 부각하여 랑케 사학을 그들의 근대 국가 건설에 있어 지적인 지주로 삼고 국가주의적 교육 제도의 정비에 활용했던 것이다.
랑케는 제도적, 방법론적으로 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고 동서양 각국의 근대 역사학 수립에 영향을 주었지만, 사료 검증의 원칙이 랑케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랑케 사학을 받아들이면서 ‘실증 사학’이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실증주의 사학’이라고까지 부르는 혼동이 생겼다. 글쓴이는 이것이 근대 국가 건설이 요구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은 까닭에 동아시아 역사학계가 범한 학문적 오류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