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에서는 한때 존재한다고 여겨졌다가 이제는 존재론적 지위를 박탈당한 대상들이 있다. 생기력, 플로지스톤, 에테르 따위가 그런 것들이다. 이 대상들이 허구적 존재자로 전락하게 된 것은 과학의 방법에 의해 경험적으로 확인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 방사선이나 전자도 과학 기술의 성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존재는 경험으로 직접 확인될 수 없기에 허구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가령 전자는 안개상자에서 증기 맺힘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찰될 뿐이지 전자를 직접 관찰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의 플로지스톤과 같은 허구적 존재를 ‘형이상학적 대상’, 책상과 같이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을 ‘관찰적 대상’, 전자와 같이 경험으로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이론으로 가정되는 대상을 ‘이론적 대상’이라고 불러 보자.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적 대상이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과학적 반실재론’은 이론적 대상이 형이상학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과학적 실재론 논쟁은 먼저 의미론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의미론적 관점은 이론적 대상을 지시하는 이론 용어가 관찰적 대상을 지시하는 관찰 용어로 완전하게 환원될 수 있으면 이론적 대상은 경험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 존재까지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과학적 반실재론은 이론 용어는 관찰 용어로 완전하게 환원될 수 없기에 경험적 의미를 결여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론 용어는 관찰 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도구로서만 기능한다고 본다. 즉 이론 용어는 세계 안의 어떤 대상과 지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며, 관찰 가능한 대상들의 작용이나 행태를 예측하고 설명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만 고안된 편리한 허구적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도 이론 용어가 관찰 용어로 완전하게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는 이론 용어가 경험적인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음을 제시한다. 다이아몬드는 단일한 종류의 탄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관찰할 수 없는 이론적 대상인 탄소 원자들이 모여 관찰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를 형성한다는 것은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의 경계선이 자명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또 바이러스는 전자 현미경에 의해서만 관찰되지만 관찰적 대상처럼 존재를 인정받는데, 이는 존재 대상이 인간의 생리 구조와 지식 상태 그리고 이용 가능한 도구에 따라 상대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의 구분이 이론적 대상과 관찰적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과학적 반실재론자인 반프라센도 관찰과 비(非)관찰을 구별하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질 수 없으며, 경계선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찰 가능한’이라는 말이 모호하다는 것만 보여 주지 양극단에 분명히 관찰 가능한 것과 분명히 관찰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머리카락이 몇 올 있을 때부터 대머리인가를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대머리는 없다고 말하는 잘못이나 마찬가지이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사람을 대머리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프라센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는 경우와 안개상자를 통해 전자의 자취를 관찰하는 경우를 예로 든다. 목성의 위성들을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는 행위는 우주 비행사가 목성에 가까이 가서 관찰하는 것과 존재론적인 연속성을 지니지만, 안개상자의 증기 맺힘을 탐지했다고 해서 전자를 관찰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전자 이론 자체의 특성상 직접 관찰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적 대상이 실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논증으로 ‘기적의 논증’을 제시한다. 과학 이론이 전자와 같은 이론적 대상을 도입하여 관찰 현상의 발생에 관한 예측에 성공했을 경우, 이를 토대로 이론적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관찰 현상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 경우는 아주 대단한 우연적 일치로서의 기적이라고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프라센은 과학적 실재론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과학의 성공을 기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론과 대상 세계 간의 동형 관계를 전제할 때만 납득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반프라센은 이론과 세계 간의 어떠한 동형 관계도 거론할 필요 없이 성공적인 이론만이 존속하는 것이 과학계의 자연스러운 법칙이라고 보았다. 진화론적 설명에서 예컨대 해당 개체의 유전 암호와 환경 간의 동형성과 같은 것은 아예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 해석에서 진화론적 관점에 선다는 것은 과학 이론을 주위 환경에 순조롭게 적응하는지 여부에 의하여 그 생존이 결정되는 종에 비유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의 과학 이론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현상 중의 하나이며, 기적일 것은 더더욱 없다는 생각이다.
‘과학적 실재론’은 전자와 같이 경험으로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이론으로 가정되는 이론적 대상이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과학적 반실재론’은 그 이론적 대상이 한때 존재했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존재론적 지위를 박탈당한 플로지스톤과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의미론적 관점에서 나타나는데, 과학적 반실재론은 이론 용어가 관찰 용어로 완전하게 환원될 수 없고 도구로서만 기능한다고 본다.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기에 이론 용어가 경험적인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과학적 반실재론자인 반프라센은 그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관찰 가능한 것과 분명히 관찰 불가능한 것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적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관찰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기적이기에 이론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기적의 논증’을 제시한다. 그러나 반프라센은 과학적 실재론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과학의 성공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