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알려진 리오타르의 철학은 ‘수직적 통합’이 아닌 ‘갈등의 옹호’로 집약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즘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원리 혹은 이야기에 의해서 수직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인 데 반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갈등의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어떤 담론이 절대적 지위를 지니고 그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다른 담론들의 정당성이 결정되는 수직적 통합은 폭력적인 것이며, 이런 통합이란 실은 근대가 낳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리오타르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리오타르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숭고’라는 개념이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미학 이론에 등장하는 숭고의 개념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확장하여 자기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삼았다. 원래 숭고는 이미 3세기 로마의 롱기누스에 의해 수사학적 차원에서 거론되었고, 18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버크에 의해 미학의 핵심 범주로 다루어졌다. 버크의 숭고는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즐거운 공포’, 즉 우리가 안전한 곳에 서서 앞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폭포를 볼 때의 느낌처럼 위대함 혹은 거대함과 관련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후 칸트는 숭고를 대상의 크기에서 환기되는 수학적 숭고와, 대상의 위력에서 환기되는 역학적 숭고로 구분하면서 숭고에 관한 버크의 논의를 체계화하였다. 그는 우리가 엄청난 크기의 대상 앞에서 우리의 지각 능력으로 도저히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고, 왜소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결코 재현하거나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함이 자연에 있다는 종교적 자각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숙한 인간이라면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이성에 의해 무력감을 넘어설 수 있는 정신적 고양을 맛보게 된다고 하였다.

 

 숭고에 대해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론과는 다른 측면에서 관심을 가졌다. 리오타르는 숭고미가 근본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 즉 숭고의 메커니즘이 지닌 역설적 성격에 주목하였다. 예컨대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숭고미를 느끼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가 결코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숭고미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되어, 재현할 수 없는 모든 대상은 근본적으로 숭고의 대상이 된다. 자연도 인간도 또 눈앞의 현실 세계 전체도 숭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에게서 숭고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현실 자체가 숭고한 것이며 어떠한 담론에 의해서도 현실 세계는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대 담론은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고 자처하지만 실은 숭고한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므로, 숭고의 체험이란 이런 허구적 거대 담론의 위선을 드러내고 거짓된 통합을 해체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볼 때 숭고란 이렇게 거대 담론의 제왕적 지위를 몰수하고 수많은 소소한 담론을 갈등과 분쟁의 상태에 빠뜨리는 기능을 한다.

 

 한편 리오타르는 숭고의 개념을 현대 미술과 연관 지어 논의하였는데, 이는 그가 언어와의 대비 속에서 이미지의 속성을 각별히 중시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재현할 수 없는 숭고의 대상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로 대상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그것을 어떤 특성으로 한정 지어서 규정하고 나머지 모든 요소는 배제하는 것인데, 숭고함이란 그런 규정마저 넘어서기 때문에 숭고함을 언어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일이 되고 만다. 그와 달리 이미지는 숭고를 표현할 수 있다. 이미지는 단일한 의미만을 전달하거나 어느 한 가지 특성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특성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수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해석 사이에 갈등과 분쟁을 낳는다. 이렇게 볼 때 이미지야말로 숭고를 구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형상을 억압하고 담론을 숭상해 온 지금까지의 역사가 거짓된 진리를 숭배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미술이 숭고를 구현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첫째는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숭고의 간접적 묘사’이다. 이는 화폭을 자연으로 가득 채우고 인간을 왜소하고 미약하게 그림으로써 대조를 통해 자연의 숭고함을 부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로, 아예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중 리오타르는 두 번째 방식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현대 예술에서 대상성이 사라지는 현상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리오타르가 특히 중요하게 거론한 화가는 미국의 현대 추상주의 작가 바넷 뉴먼이다. 뉴먼은 버크와 칸트의 숭고 개념을 나름대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회화에 적용하려 시도했는데, 이를테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화폭 어딘가에 어떠한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 형상에 해당하는 검은 수직선 하나를 그리는 추상화 같은 것이다. 이런 작품 앞에서 관람자는 그 어떠한 재현적인 체험도 할 수 없다. 뉴먼은 자신의 작품이 한갓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과 같은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표현하려는 것은 미적 구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즉 ‘존재의 사건성’이다. 그래서 뉴먼은 자신이 잭슨 폴록 같은 액션 페인터에 가깝다고 보았다. 액션 페인팅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성과 현장성이기 때문이다.

 

 뉴먼의 이런 생각은 예술의 본질이 ‘존재자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리오타르의 관점과 일치한다. 지성적 사유는 존재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뿐 사건으로서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예술 역시 그것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도무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관람자가 느끼는 순간 소환되는 특별한 충격을 통해 존재란 애초에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이다. 뉴먼의 작품처럼 진정한 예술은 우리에게 낯익은 세계의 재현을 파괴함으로써 그 뒤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낯선 세계를 드러낸다. 리오타르는 이와 같은 인식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숭고의 본질, 즉 현대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특정 담론의 절대적 권위에 의한 수직적 통합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 달리,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여러 담론 간의 갈등을 옹호한다. 이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 할 때 발생하는 숭고미가 거대 담론의 제왕적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리오타르는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현대 미술과 연관 지어 숭고를 논의하였는데, 숭고의 부정적 묘사와 관련된 중요 화가로 바넷 뉴먼을 들 수 있다. 버크와 칸트의 숭고 개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미술로 구현하고자 한 뉴먼의 작품은 예술의 본질이 존재의 사건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인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리오타르의 관점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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